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 찬란한 바다와 역사 깊은 건축물이 어우러진 이곳은 지금은 그리스 문화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한때 유대인들이 다수였던 ‘유대인의 도시’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바로 테살로니키에 남아 있는 유대인의 흔적을 찾는 것. 하지만 도시를 거닐다 보면 그 흔적은 너무도 희미합니다. 몇 백 년 전, 스페인 종교재판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관용 아래 꽃피운 유대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이제 더 이상 그들의 도시가 아닙니다.
화려한 재건, 그러나 사라진 과거 – 모디아노 시장
여행의 첫 목적지는 100년의 역사를 지닌 모디아노 시장(Modiano Market)이었습니다. 최근 새롭게 단장되어 현대적인 분위기와 유럽풍 델리, 트렌디한 카페들로 가득한 이곳은 한눈에 보기엔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시장의 이름이 유대인 건축가 엘리 모디아노(Elie Modiano)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자리가 과거 탈무드 토라(Talmud Torah) 회당이 있던 곳이라는 점 외에는 유대인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예전엔 코셔 정육점이 있었던 자리가 지금은 견과류 가게로 바뀌었고, 화려한 부활절 장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라진 공동체, 남겨진 기억
테살로니키는 한때 유럽에서 유일하게 유대인이 인구 다수를 차지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1917년의 대화재와 1943년 나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 이송으로 인해 공동체는 붕괴되었습니다. 무려 70개의 회당이 사라졌고, 5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제 이 도시의 유대인 인구는 1,000명이 채 되지 않으며, 남아 있는 회당은 단 두 곳뿐입니다. 유대인 전문 가이드를 찾는 것조차 어려웠고, 결국 아테네에 기반을 둔 유대인 여행사를 통해 투어를 예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기억을 전하는 사람들
다행히도 저를 맞아준 가이드 엘리아 마탈론(Elia Matalon)과 그의 아내 헬라 쿠니오(Hella Kounio-Matalon)는 이 도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대인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직접 겪은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헬라의 아버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고, 엘리아의 어머니는 알바니아로 숨어 들어가 전쟁을 피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저를 데리고 유대인 은행가였던 알라티니 형제가 세운 건물, 회당이 있던 자리를 지나며 지금은 후카 바(물담배 카페)가 된 저택의 문설주에 남아 있는 메주자 자국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작고 사소한 흔적이야말로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였습니다.
남겨진 회당에서 울려 퍼진 ‘아디오 케리도’
투어의 마지막, 그들은 저에게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라디노어(Ladino)로 된 전통 노래 ‘아디오 케리도(Adio Kerido)’를 회당의 비마(단상) 위에서 불러준 것이죠. 이는 스페인계 유대인들이 쓰던 언어로, 이별의 슬픔을 담은 곡입니다.
"No kero la vida…" “난 이 삶을 원하지 않아.”
그들의 목소리는 회당을 가득 메웠고, 순간 저는 시간 여행을 하는 듯했습니다. 이 도시에 남겨진 유대인의 과거를 쫓아왔지만, 이 노래는 그들의 현재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라지지 않은 기억, 살아 있는 문화, 그리고 여전히 맥을 잇는 사람들.

여행의 끝, 그리고 시작
테살로니키에서 유대인의 역사를 찾는 일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을 쫓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도 존재하는 유대 문화’를 만나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 도시에 유대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는다면, 우리는 더 넓고 깊은 그리스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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